2011년 8월 31일. 서울 광화문.
스마트 폰으로 멘델스존의 피아노 삼중주를 들으며 <A가 X에게>를 읽고 있었습니다.
문득 눈을 들어 보니 나는 출근길입니다.
창밖으로는 영화의 어느 장면처럼 정부종합청사 근처의 가게들이 빠르게 뒤로 달리고 있었습니다.
맑은 풍경을 보는데, 불현듯 슬픔이 수증기처럼 부드럽게 밀려올라 왔습니다.
나는 그 슬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.
분노도 한 줄기 넝쿨처럼 감겨있었습니다.
이것은 무엇 때문인가?
그 슬픔이 이런 느낌으로 말했습니다.
“나는 네가 사람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슬프구나”
이내 나는 그 사람들이 누군인지 알았습니다.
항상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요.
그들은 지독한 변비 환자들이거나 아니면
통제 안 되는 설사병을 오랫동안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.
나는 그들의 몸에 흡수되지 않은,
내용물까지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경험의 찌꺼기들을 소화시키고
남은 것은 밖으로 내 보내도록 합니다.
그리고 그들은 내게 오물 처리비용을 지불하죠.
하지만 때때로 감당해야 할 경험이 너무 심하면
그들은 자신의 배설물을 내 얼굴에 내 뱉기도 하고,
때로는 내가 보는 앞에서 꿀꺽 삼키기도 합니다.
그리고 그들은 다시 비용을 지불하죠.
어느새 차는 광화문에 도착했고,
생각이 그렇게 뛰어다니다 우뚝 멈춰서서 내게 묻습니다.
“이것은 내 자신에게 윤리적인가?”
나는 울음이 나옵니다.
스마트폰과 나를 이어주는 이어폰에서는 계속 멘델스존이 흐릅니다.
출근인파로 북적이는 광화문 네거리
8월의 마지막 아침 햇살은 뜨겁고
울음을 참는 내 입술은 바이올린 선율처럼 떨립니다.
정장을 차려 입은 한 명의 오물처리기사가 도로를 건너 교보문고 앞을 지납니다.
음악은 스크리아빈으로 바뀌고
저음의 베이스 금관이 파열하는 소리를 냅니다
문득, 가슴 쪽의 혈관이 파열되는 것 같습니다.
일터로 들어오며 생각을 차곡 차곡 개킵니다.
내 아이들에게 이 얘기가 전해지면 좋겠습니다.
모욕당하는 아버지 얘기가 아니라
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생히 알기 위해
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은 한 남자의 얘기를 말입니다.
가능하다면, 내 앞에 앉았던 그들도
나는 당신들을 사랑하기 위해 내 살과 피를 발라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.
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 누가 몰라도 괜찮습니다.
자발적으로 선택한 고통을 누구에게 알아 달라고 해서는 안되는 거니까요.
돈을 버는 모든 일은 모욕을 참는 행위인지도 모르겠습니다. 모든 일이요.
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겪는 일입니다.
집으로 돌아 가는 길,
다시 <A가 X에게>를 읽다가 이 구절을 봅니다.
“사람들의 설득이 닿지 않는 곳”
아이다(A)가 구름 속에서 발견한 그 곳을 자비에르(X)에게 알려 주는 말입니다.
사람들의 설득이 닿지 않는 곳.
사람들의 설득이 닿지 않는 곳.
나도, 당신들도 어느 한 시간 작은 한 공간 정도는 사람들의 설득이 닿지 않는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.
한해가 또 갑니다.
올해, 당신에게 ‘사람들의 설득이 닿지 않았던 곳’은 어디였습니까.
송구영신, 이렇게 대신합니다.